제2 경제위기론의 실체와 배경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특강
와이즈인포넷 회장 재임시 : 2000년 11월 3일


오늘 강연주제로 정한 제 2 경제위기 문제는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신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다고 해서 그에 영향을 받아서 주제를 선정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와이즈인포넷에 오기 전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으로 있을 당시인 월간조선 9월호에 같은 주제로 실린 대토론 내용을 보시면 언론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훨씬 이전에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토론에서 다루었던 내용은 제 2 경제 위기 도래의 가능성과 만일 경제위기가 온다면 어떤 형태가 될 것이고, 경제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전문가와의 토론입니다. 참여한 전문가로는 잘 아는 고려대의 곽상경 교수와 언론계 계시는 분, 기업과 실물경제를 잘 아는 분들이 참여했고, 제가 직접 사회를 보았습니다. 약 3시간 반 가까운 토론 내용을 정리하여 월간조선에 실었는데 제가 보기에 이처럼 심도 있게 제 2의 위기에 대해 토론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제가 오늘 강연을 시작하면서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면 우리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금융위기, 금융경색, 주식시장의 침하, 유가의 상승, 동남아 외환위기의 재발, 미국경기의 연착륙 여부와 그에 따른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의 요인을 가지고 우리의 경제 위기를 논하고 있습니다. 좀 더 깊게 이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동안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던 구조개혁의 성과에 대한 문제 제기와 개혁 실패에 따른 대외 신뢰도의 상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론에서 제기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의미가 있고, 주목할 사안들이라고 보지만 오늘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문제를 포괄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즉 모든 국민들이 가지고 있 는 위기에 대한 심리적 구조 그리고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도 문제가 어떤 요인에 의해 변동되며, 향후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인지 등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균형잡힌 경제 의식을 가진 분들이 내린 우리 경제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표상으로 본 한국 경제는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9%내외가 될 것이고, 국제수지 흑자도 적어도 100억불이상 날 것으로 보입니다. 물가의 경우도 최근 고유가로 불안하기는 하지만 2-3% 수준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외환보유고도 900억불 이상입니다. 이런 정도라면 펀더멘탈(Fundamental)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정부도 요즘은 다소 걱정을 하고 있지만 두 달 전만 해도 이러한 경제지표를 언급하면서 부분적인 문제는 있지만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될 염려는 없다고 단언을 하였습니다. 저도 그런 관점에서는 정부의 그러한 단언이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심리 근저에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 있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대 출신인 매경의 김동원 논설위원은 '위기론의 재생산 구조'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그 분과 토론하면서 그 용어가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오늘 저도 그 용어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만일 이러한 위기의 재생산 구조가 단지 심리적 현상이라고 보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 구조가 실제적인 경제의 결과치와 연결되어갈 때에는 새로운 위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지금 정부가 IMF 위기 이후 상당히 많은 구조조정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조치가 발표되나 이런 조치에 대한 국내외 시장의 반응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우리 국가 전체가 경제 문제에 대해 본질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회의가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의약분업 사태와 같이 큰 국가적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그 이슈가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 주식 시장에서의 외국인 비중이 IMF 시기와 비교하면 매우 높아졌습니다. IMF 시점에 전체 대비 10%내외이던 보유 주식중 15%에서 20%가 철수함에 따라 유동성 위기인 외환위기가 본 격화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체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비중이 30%가 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에 의해 우리 경제의 명운이 좌우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우리 경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외환보유고가 높아진 지금 시점에서는 외국인들의 철수가 97년과 같은 경제위기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경제가 다시 위기를 맞는다면 97년과 같은 모습의 위기는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외환 유동성 문제로 야기되는 위기는 비교적 극복하기 쉬운 위기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추진하고 있는 금융과 기업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지 못함에 따라 발생하는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요즘 기업하는 분들을 만나면 회사 경영이 매우 힘들고, 돈 구하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을 합니다. 최근 3년간 총통화 기준으로 매년 35%씩 통화가 증가했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분들에게 자금이 오질 않고 있습니다. 금융기관은 자금 제공의 역할을 거의 포기하고 있고, 국공채 시장에서 채권을 구입하는데 대부분의 정열을 쏟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분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비유하길 '배가 침몰하여 사방에서 물이 밀려들어오고 있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금융과 기업의 근본적인 침하를 가져오는 사태의 발생 그리고 이것이 우리 경제의 전반적인 경쟁력의 상실로 연결될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태의 도래를 막기 위해 정부와 각계 각층이 노력하고 있지만 저도 나름대로 이러한 위기의 원인에 대해 신문의 시각과는 달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 말에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하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쳤다면 그래도 괜찮으나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보기에 이러한 속담이 만들어진 시대만 해도 매우 단순했던 시대라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의 사회현상은 이러한 단순한 속담으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이 경우 먼저 왜 소를 잃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를 잃었기 때문에 무조건 외양간을 고친다는 생각은 옛날에는 옳았을지 모르나 오늘의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봅니다. 그만큼 우리의 경제 현상은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또 하나 만일 외양간을 고쳤다면 그 고친 결과로 다시는 소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소를 잃었는데 그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고 또 잃어버리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지 않고 외양간만 고치는 시늉을 했다면 다시 소를 잃지 않는다는 신뢰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만 지금 언론에서는 경제가 어렵고, 위기의 재발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오늘 52개 기업을 포함한 정부의 구조조정 내용이 발표가 되었습니다만 이러한 구조조정 노력이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위기론의 가장 큰 이론적 근거라고 봅니다. 제가 금융시장이 경색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우량기업을 제외하고서는 신규 회사채의 발행분과 상환분을 소화시킬 방법이 없고, 올해만 해도 대략 30조원, 내년에는 80조원의 회사채 상환에 대해서도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고 봅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 경제가 좋았다고 평가되던 시기에도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등의 일부 대표적인 업종을 제외하고는 좋은 상황이 아니었으며, 지역적으로도 수 도권과 지극히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는 지방과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경제적 상황과 의약분업 등의 사회적 이슈를 해결할만한 정부의 역량이 빠른 시간내에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들이 위기론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본질적인 문제의 접근을 위해서는 IMF 위기 후 위기의 배경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 노력을 통하여 진정한 교훈을 얻었느냐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과정을 제대로 겪었다면 지금처럼 심리적 위기론을 겪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제대로 된 경제라 해도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러한 문제들은 경제 내부의 해결능력에 의해 끊임없이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이러한 해결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또 하나 앞으로 우리의 앞날을 낙관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올해보다는 내년과 내후년이 중요하며, 길게는 5년, 10년 후에도 우리가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현재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사항들이 근저에 깔려있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리 경제의 외형이 좋다고 하더라도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부적으로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면 다소 경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경제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분좋게 술집에서 술은 마셨는데 새벽녘에 술집을 나서 게 될 때 주머니의 돈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접합점이고,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과연 IMF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었느냐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선 제 개인으로는 97년 당시 경제수석을 한 사람으로서 외환위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지난 97년 외환위기의 원인과 실체에 대해 편견없이 균형된 시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해 보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봅니다. 옛날이라면 외양간을 고치는 노력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왜 소를 잃게 되었는지에 대해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를 잃어도 그럴진데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인 외환위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진지한 토론 과정을 통하여 원인에 대해 정리하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국회에서 청문회도 했고, 검찰에서 수사, 기소해서 수십 회의재판도 했지만 정치적 고려를 떠나 진정으로 경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깊이 있게 분석한 결론에 도달한 적은 없습니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후진적으로 보는 태국의 경우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보다 훨씬 합리적이었습니다. 태국은 중앙은행의 전직 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7명의 전문가로 '누클 위원회'를 구성하여 몇 달에 걸친 연구 조사에 착수했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착수하기도 전인 98년 6월경에 외환위기 원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보고서 내용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균형된 내용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결과에 대해 온 국민들이 승복하였고, 이를 토대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국력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례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 대처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는 기능과 노력없이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이 나올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오늘 배포한 자료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외환위기는 국제적인 요인과 국내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구조적으로 접근할 부분도 있고, 상황적 측면에서 접근할 부분도 있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측면이 메트릭스적으로 얽혀 외환위기의 원인이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요즘 정부가 4대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4대 개혁이란 정부개혁, 금융개혁, 기업개혁, 노동개혁으로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연결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위기 이후 IMF가 우리에게 이 4대 개혁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우리도 그를 인정하여 개혁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인들이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재벌구조만 해도 그 기원은 박대통령 시대부터입니다. 박대통령이 개발시대를 만들어 가면서 등장시킨 것이 재벌입니다. 재 벌이 그 정책에 편승했고, 정부는 기업을 이용하여 한국의 경제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러한 한국주식회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것이고, 한국의 독특한 경제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금융과 노동의 문제도 몇 십년간 축적된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오래된 문제들이 축적된 한국경제가 왜 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느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97년의 상황적,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상황적인 요인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보면 제가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매달 한 건씩 커다란 부도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피크가 7월달에 있었던 기아사건입니다. 그리고 97년이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치 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은 정치가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며, 시장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좌우되는 정경유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한국에 투자하겠다는 외국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전과 비교할 때 지난 대통령 선거는 누가 당선될 것인지에 대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하나 IMF이전에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그 당시의 경제팀이 IMF와 긴밀한 협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대통령 고유의 인사권 발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긴밀한 협상을 추진하던 경제팀을 바꾸는 것은 IMF와 국제사회에 불신과 의구심을 심어주었습 니다. 비밀 협상을 통해 거의 중요 사안들에 대해 합의를 도출한 협상중인 사람들을 바꾼다는 것은 외국인들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세계 금융시장에 하루에 2조원 가까운 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자금들의 대부분은 단기금융 차익을 노리는 다분히 투기성 자금입니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수 십억의 돈이 단숨에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입니다. 세계 금융시장에서 국경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의 질서를 이루었던 IMF체제의 한계가 도래한 것입니다. IMF체제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국제 금융의 구조적 문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IMF를 경험한 이후 국제사회에는 앞으로 어떤 나라도 그러한 위기가 생겼을 때 경제가 붕괴되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많은 일본도 예외일 수 없고, 중국 도 예외일 수 없을 정도로 세계 금융은 취약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금융구조의 본격적인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 동남아 외환위기였고, 그 중에 한국이 대표선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금융의 구조적 문제점들도 금본위제에서 전환한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97년에 터진 이유를 정확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태국으로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의 북상효과에 우리가 전염되었습니다. 제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도 태국의 위기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는 우리와 그렇게 경제관계가 깊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가 어렵다고 해서 물론 간접적인 영향은 있겠지만 직접적인 영향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나라들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일본을 우회하는 모습으로 발생했습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많은 나라들에 투자를 하고 있었고, 외환위기 발생에 따라 그 나라로부터 발생하는 손해를 메우기 위해 한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전염효과가 발생했습니다.

심지어는 음모론까지 나왔는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위기 발생원인은 미국, IMF, 월가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시스템을 자기들이 원하는 형태로 바뀌기 위해 의도된 각본을 가지고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90년대 초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미국의 재무성, 월가, 금융전문가 등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간의 무언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시장 경제제도를 확신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가 이 제도를 전파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무언의 합의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국이 생각하는 이념, 가치, 경제제도에 순응하지 않는 세계 각국에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우리의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라는 음모론입니다. 이 이론은 100% 확인될 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생각하는 개발체제가 완성되고,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1975년도부터 한국경제는 계속 고성장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매년 7, 8% 고도 성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체질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경우 5-6% 선이 될 것이고, 만약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기가 온다면 3-4% 선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5-6% 경제 성장률 때문에 걱정을 하면 외국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외국은 보통 3% 내외의 경제성장을 하면 아주 고성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5%만 되어도 큰일납니다. 만일 내년 경제가 5% 선이 되면 경제장관이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언론과 국민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할 것입니다. 굳어진 고성장 체질 때문에 정부는 항상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고, 기업도 확장경영구조를 지속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축적되어 폭발된 것이 외환위기로 촉발된 1차 경제위기의 실체이며, 박대통령이 한국경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30여년 동안 한국 경제를 이끌어왔던 성장모델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우리에게 세 가지 신화가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항상 고성장을 할 수 있다는 '고성장에 대한 신화'입니다. 둘째는 기업과 정부가 뭉쳐서 지금의 한국경제를 만들었다는 재벌형성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한국주식회사의 신화'입니다. 셋째는 경제가 잘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경제제일주의의 신화'입니다. IMF가 오기 전 최근까지 한국경제를 지배하던 세 가지의 사상이 바로 이 세 가지 신화입니다. 이 세 가지 사상으로는 더 이상 안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IMF위기입니다.

IMF 이후 위기의 원인에 대한 탐구와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4대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 개혁의 목표는 시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네 가지 사회부분의 근본적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 동안 정부가 지금까지의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 긍정적 노력을 했지만 이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부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정부 개혁의 당위론 입니다. 그 동안 한국경제를 위한 재벌의 공헌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이러한 재벌구조를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 재벌개혁입니다. 금융의 경우도 제한된 자원을 정부의 정책방향 하에서 나누어지는 역할이 유효했지만 이제는 다른 원리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사문제의 경우도 세계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격렬한 분규를 겪어왔습니다. 이미 노사문제는 선진화된 국가들에게서는 주요한 경제문제로부터 벗어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원리는 '시장기능'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통해 시장에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시장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만 정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4대 부분의 개혁을 통괄할 수 있는 목표가 있다면 '시장의 형성과 시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 정립'입니다. 또한 기업은 시장으로부터 어떻게 평가받고, 금융과 노동은 어떻게 제대로 된 금융과 노동시장을 만들 것인가로 집약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이제 한국경제의 운용은 한국의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방식과 표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사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91년도에 대외경제 실무책임자로 있으면서 비교적 깊이 있게 북한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한에 가면 많은 구호를 볼 수 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우리식대로 살자'입니다. 못살아도 좋으니 우리식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북한의 사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습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우리식대로 살자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국제식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개혁의 목표는 첫째는 각 분야에 대한 시장 원리의 확산과 둘째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룰과 규범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내용적으로 과연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만든다는 것은 시장에 대한 정부 역할을 적절히 설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장에게 해결 기능을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고도 안되는 경우 정부가 개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개혁의 출발점은 정부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정부개혁의 의미는 기구의 통폐합과 인원 감축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정부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정부의 역할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는 항상 모든 일을 다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박대통령 시절 공무원을 한 사람들은 한동안 '정부만능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깊이 생각하는 것에서 개혁의 출발점이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동안 우리가 추진하던 개혁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던 개혁은 기업과 금융개혁입니다. 정부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사개혁은 출발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금융개혁보다도 더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 설정과 노사문제를 시장에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사문제를 좀 더 거론하자면 노사문제를 경제문제로 보지 않는 시각들이 있습니다. 물론 노사문제를 경제적 시각만으로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주의를 채택한다는 것은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시장의 기능을 먼저 살리고, 그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분야에만 정부가 개입한다는 원칙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근로조건과 임금 수준의 결정도 기본적으로 노동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정부가 주도하여 결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최근 노사정위원회에서 주 5일 근무제도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한바 있습니다. 주 5일제는 44시간 일하던 것을 40시간 일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44시간 일하면서 받던 돈을 40시간 일하면서 받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임금은 10% 상승됩니다. 물론 이 상승분을 기업이 부담할 수 있으면 좋은데 부담할 수 없는 기업도 있을 것입니다. 임금 수준의 결정은 개별기업별로 노동자와 사용자가 시장원리에 의해서 협의 해결하는 관행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노사개혁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부담할 수 없는 기업들에게는 큰 갈등이 초래될 것입니다. 이것은 노사문제에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노사문제를 노사정위원회가 결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따르게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시장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며, 개혁의 방향과도 반대됩니다.

의약분업문제도 국가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의사와 약사의 직업 이기주의도 있고, 정부도 잘못 추진한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원은 국민의 건강을 누가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정부가 책임질 것인가, 아니면 국민 스스로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건강에 대한 대비는 평소 자신이 준비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보험입니다. 보다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평소 더 많은 돈을 축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소 건강에 자신있는 분들은 보험을 들 필요가 적을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미국에 3년 근무했는데 그때 건강에 자신도 있고 돈도 없어서 보험을 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 기간동안 큰 문제가 없었는데 미국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건강에 자신이 있으면 비용을 적게 들일 것이고, 병에 걸리게 된다면 그에 대한 리스크를 자신이 부담해야 합니다. 그것을 중개하는 보험기능이 상업의료보험입니다. 그런 의료보험시장을 개발하여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 자신의 건강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대상을 되도록 줄여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국민의 50% 이상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건강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을 잘 조정하면 병원제도와 수가제도 그리고 의료보험제도가 잘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50% 사람들 그럴 능력과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사회보험제도와 의료부조제도가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료보험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의약분업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근저에는 자신들이 공부하는데 들이는 기간과 비용은 많은데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현 제도하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고 병원이 본연의 진료 치료 기능만 해서는 병원 운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부의 대안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의사의 의료공급과 환자의 의료 수요를 시장에서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제는 시장원리를 적용하나 경제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시장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원리에 의하지 않고 괴리된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게 됩니다. 어긋난 바퀴를 가지고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97년의 외환위기가 단순한 유동성 위기라고 한다면 달러만 구해오면 간단히 해결될 것입니다. IMF가 400억불, 500억불을 빌려주겠다고 했으니 우리의 위기는 해결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IMF로부터 돈을 들여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위기는 증폭되었고, IMF는 자신들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각종 주문을 했고 우리의 정부는 그에 맞추어 구조개혁을 실시한 이유는 단순히 유동성 위기보다는 구조적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발생이 이러한 강한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 한다면 1년 반만에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1년 반만에 극복될 수 있는 위기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98년 마이너스 경제를 실현하다 99년과 올해 8-9%의 성장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외형상 위기를 극복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극복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외국인과 국민들의 불안감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실력이상으로 잘되고 있는 것 같아 막연한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 수술한 사람이 서서히 회복해서 건강을 되찾으면 좋은데 수술은 하지 않고 단기적인 투약처방으로 몸이 좋아졌다면 외형상으로는 보기 좋은데 마음속으로는 불안한 것입니다.

개혁에 대한 역사가 많습니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중종시대의 조광조 개혁, 정조의 개혁, 조선말 김옥균 등의 개혁파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잘 알고 계시는 것과 같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도 송나라시대 왕안석의 개혁도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IMF를 맞이하면서 우리 정부가 개혁을 시도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IMF체제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개혁의 대수술을 한번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정말 좋은 여건 하에서 취임하게 된 것입니다.

개혁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개혁의 동참세력을 규합하고,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 발생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환란 당시 경제정책의 주요책임을 지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환란의 책임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정치인, 언론인들이 책임이 없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근로자도 엄청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87년 이후 외국인들은 수많은 불법적인 노동쟁의들이 발생하는 이러한 노사관계하에서는 절대 투자할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 관료도 당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개혁의 고통이 길고 힘들다는 것을 설득하고, 인식시키고, 참여시키는 노력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동안 그러한 노력은 없었다고 봅니다. 근로자에게는 몇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이므로 조금만 기다리면 경제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정부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모든 사람을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스탠드에서 관전하는 관객으로 간주했습니다. 개혁에는 정부와 기업 몇몇을 등장시켜 모든 국민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식의 개혁정책을 그 동안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불안감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1차 경제위기로부터 교훈을 얻는데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국내외적으로 발생하는 불안감의 근저에 깔려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대응은 '어려울수록 정도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원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시 돌아온다면 옛날처럼 우리 식의 해결은 어렵고, 온 세계가 인정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하면서 정책을 운용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국의 대처수상이 했던 노력을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처가 집권할 당시 영국은 영국병에 걸려 있었고, 매일같이 탄광노조등 노동쟁의가 끊일 날이 없었고, 생산성은 떨어지고, 사회는 이완된 상태였습니다. 대처는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어렵지만 참고 기다려야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득했습니다. 노조와 언론과 의회가 끊임없이 다양한 요구들을 했지만 항상 대처의 대답은 '대안이 없다' 즉 참고 우리의 행태를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Mrs TINA(There Is No Alternatives)'였습니다. 우리의 경우 만일 책임 있는 관료가 이러한 대답을 했다면 며칠가지 못해 경질되었을 것입니다.

개혁과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핵심요소는 첫째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장기적인 방향은 옳은데 단기적으로는 어려운 '장단기문제의 상충'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업구조조정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건설 등이 문을 닫거나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면 시장이 요동을 치게 됩니다. 이것을 견디기가 매우 어렵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의 대응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들 외면합니다. 당장 자신의 살 걱정과 선거의 표 걱정을 합니다. 이에 대한 극복이 개혁 성공의 핵심 요소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대처가 했던 개혁의 노력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대처는 10여년 간 엄청난 싸움을 했습니다. 또 경제학을 공부하지 못한 대처가 어떻게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의 결과 유럽에서는 가장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습니다.

개혁정책은 경제제일주의 생각만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경제만 잘되면 남북문제, 노사문제, 사회복지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같이 가야 합니다. 재정정책, 남북정책, 노사정책, 사회복지정책들이 일관성 있는 원리에 의해 추진되어야 합니다. 경제는 개별기업간 시장원리에 의해 해결하라고 하면서 노사문제는 노사정 대표가 모여 결정할 것이니 각 기업이 따라야 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을 끌고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의 제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은 모양이 좋은 것 같아도 경제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국민기초생활보호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백만원 소득이 안되는 사람은 근로능력과 의사의 유무에 상관없이 수입의 차액을 보전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제도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국세청도 파악하지 못하는 소득을 사회보장요원들이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생각은 좋은데 실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엄청난 부작용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대북정책과 4대연금 등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과연 우리가 우리 경제의 스톡(stock)을 불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까먹고 있는지 즉 저수지에 계속 물을 채우면서 물을 쓰는지 아니면 물을 채우지도 않고 계속 쓰고만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새로운 세기의 한국경제가 걸어갈 방향에 대한 확신을 국내외적으로 얻어야 합니다. 그에 대한 불안감이 사람들에게 축적되어 가고 있습니다. 몇 달전만 해도 막연한 기우였는데 최근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지표상에 반영되기 시작했고, 이미 외국의 리포트에는 한국의 불안함을 지적하는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외국인을 믿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97년 10월 15일 IMF 조사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전반을 조사한 후 한국경제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정부가 잘 대처하고 있고, 펀더멘탈이 좋기 때문에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달 남짓 지나고 그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극복과정에서 IMF는 한국을 성공적인 모범사례로 극구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IBRD 총재가 98년말 IMF 극복 세미나를 하면서 김대중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어떤 기자가 총재에게 묻기를 외환위기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이야기하면서 한국경제가 좋다고 하였는데 외교적으로 말했던 것이냐 아니면 위기가 올 것을 모르고 그렇게 대답했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하 면서 총재는 일곱 번이나 '나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어쩐지 모르지만 나는 몰랐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와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김대중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 내용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 대한 신뢰와 불신은 쉽사리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와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외환위기이후 지금까지 경제가 좋았던 것은 외상으로 했던 것이며, 그 값을 치를 시기가 앞으로 오기 때문에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능력의 성숙도가 갖추어져야만 됩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제 2의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끊임없는 위기의식이 재생산되는 구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