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새문안 12월호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재임이후 : 2005년 12월 20일


한국경제가 직면한 '인식(認識)의 위기'


우리 경제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궁금증과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우리나라가 계속 높은 성장을 이어 가면서 멀지 않아 동북아의 중심 국가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경제가 지난 번 경험한 외환위기에 이어 ‘제 2의 위기’의 가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또 이런 위기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면 지난 번 외환위기보다 훨씬 심각한 구조적 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방향이 현실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우리 경제의 앞날에는 명(明)과 암(暗)의 양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우선 밝은 면을 보면 정보통신(IT)과 생명공학(BT) 분야의 강점을 들 수 있다. 최근 황 우석 교수는 연구성과의 진위여부로 큰 논란에 빠져있지만 이런 논란이 있기 전 그로부터 생명공학 분야에 있어서 한국의 현 위치와 장래 가능성을 듣거나 진 대제 정부통신부장관으로부터 앞으로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듣고 있으면 우리 경제의 앞날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보인다.
이 이외에도 최근의 한류(韓流)의 열풍에서 보는 것 같이 서비스부문의 발전 가능성, ‘기러기 아빠’로 상징되는 여전히 높은 교육열, 혁신 형 중소기업의 가능성,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 가능성 등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밝게 하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세계최저의 출산율과 급속한 인구 고령화 추세, 경제의 전반적인 경쟁력(이를 전문 용어로 총 요소생산성이라 한다)이 서서히 떨어져 가는 추세, 기업의 투자의욕 감퇴, 각 부문의 양극화의 심화 등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매우 어둡게 하는 요소들이다.
특히 한국경제는 전망하기가 어려운 경제다.
너무 가변 요소가 많을뿐더러 경제외적 요인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경제의 장래가 경제전문가들의 예측 범위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마칠 수 없는 경제의 전망을 가지고 설왕설래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우리 한국경제가 가지고 있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중에서 밝은 면을 부각시켜 나가면서 어려움 즉 위기적 요소도 이를 기회의 요소로 전환시켜 갈 경우에는 한국경제의 장래는 밝을 것이고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실천과정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두운 미래를 맞을 것이다.
경제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평범한 진리가 장기적으로는 결국 맞아 떨어지는 영역이다.

내년도 경제는 금년도 보다는 좀 나아질 것이고 세계경제도 최소한 금년 보다 불리하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당연히 정부는 이런 편에 서 있다. 내수가 조금 살아나는 것 같아 보이고 기업 활동에 대한 전망도 다소 나아지고 특히 최근 주가가 계속 상향 추세를 보이고 있어서 매우 고무되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되면 한동안 우리 사회의 화두의 하나인 ‘또 다른 한국경제의 위기’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빛을 잃게 마련이다.
그런데 경기 전망이 단기적으로 좀 나아지면 위기가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위기가 된다면 이 ‘위기론’이 무슨 논의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수 년 전 최 인호씨의 인기소설 <상도(商道)>를 흥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베스트 셀러로 100만 부 이상이 팔렸던 책이다.
이 책에는 약 200년 전 실존했던 주인공 임상옥이 한 때 승려가 되려고 수업을 하던 암자를 떠나 다시 상계(商界)로 나올 때 그의 스승인 석 숭이라는 스님이 임상옥이 장래 상인으로 대성할 것을 예언하면서 그러나 미래에 닥칠 세 번의 위기와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비책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그 예언대로 임 상옥은 전무후무한 조선 최고의 무역상으로 거부가 되고 이 과정에서 세 번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 내용, 그리고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테마이다. 이 예언의 과정에서 석 숭 스님이 임 상옥에게 하는 말 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문제는 네가 첫 번째 위기는 위기임을 알겠으나 두 번째 위기는 위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위기를 위기로서 직감할 때에는 헤어날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위기를 위기로서 인식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멸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하여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가 혹시 무서운, 위험한 고비가 아닐까 생각하여라.”

97년부터 한국이 경험한 경제위기는 외형적으로 ‘외화유동성 위기’ 즉 달러의 부족 형태로 왔기 때문에 누구나 위기가 도래한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었고 따라서 위기를 헤쳐 가는 것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다.
일찍이 1년 반에 IMF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당시 김 대중 대통령의 공언이 그래서 나왔고 IMF의 지원자금의 조기상환과 ‘IMF의 완전극복’ 이라는 우리 경제의 위기극복 선언도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1차 위기의 본질은 결코 유동성 위기가 아니다.
이 위기의 본질과 배경은 한편으로 구조적인 관점과 상황적 관점에서, 또 한편으로는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 시각을 종합하는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여야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인식도 없었고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음으로써 문제의 본질 즉 위기의 진정한 성격과 배경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넘어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는 엄청난 코스트를 치르고도 이 위기로부터 얻어야 할 적절한 교훈을 얻는 데 실패했다.

국민 경제의 진로에는 끊임없는 성공과 위기가 교차하게 마련이다.
제대로 된 국민경제라면 상당한 성공에 대한 기억이 없을 수 없고 한편으로는 위기에 대한 경험 또한 없을 수 없다.
문제는 성공의 체험에 빠져서 여기에 안주하면 그 성공이 계속 보장될 수 없고 위기가 왔을 때 이로부터 유효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새로운 위기를 맞았을 때 넘어지기 마련이다.
‘성공신화로부터의 탈출’과 ‘위기로부터의 유효한 교훈의 습득’이 국민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요인이다.

우리 경제가 맞이한 97년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보면 우리 경제가 성공신화에 매몰되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해서 맞이한 것이다.
박 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이미 70년대 중반에 이미 비약적인 경제 발전의 토대가 서고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는 한국경제의 성공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신화의 밑바탕에는 경제발전에 대한 강력한 국가의 의지, 경제 각 부문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높은 경제 성장과 기업 확장 목표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끊임없는 추구,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한 정부와 기업의 강력한 연계 구조, 경제를 빨리 발전시켜 이를 바탕으로 다른 주요한 국가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하겠다는 사고 등이 깔려있다.
필자는 이를 한국경제의 3대 신화 즉 ‘고도성장의 신화’, ‘한국 주식회사의 신화’, ‘경제 제1주의의 신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때 즉 70년대 중반부터 97년의 우리 경제의 위기의 싹은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70년대 말부터 이러한 신화가 계속 작동하기 어려운 징후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위기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경제의 문제를 구조적이고 본질적으로 보는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우리 경제의 운영의 틀을 바꾸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이러한 성공신화에 젖은 정부의 변하지 않는 고(高)성장 위주의 정부 주도의 경제운영 방식과 이에 대한 뿌리 깊은 국민의 기대 의식 그리고 팽창 위주의 기업경영 관행이 극복되지 못한 채 97년을 향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세계경제의 구조적인 변화는 우리경제 운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타율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국제 금융사회로 하여금 우리 경제의 장래에 대해 결정적인 의문을 갖게 만들었고 97년 이들은 우리에게 새로이 달러를 빌려주지 않는 것은 물론 이미 빌려줬던 달러까지 갑자기 다투어 거두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만약 앞으로 한국경제에 새로운 위기가 온다면 또 다시 유동성 위기의 형태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WTO 가입 이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역할 증대, 인도와 같은 신흥 경제권의 부상, 미국 등 기존의 선진경제의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경영과 기술수준과 우리의 그 것과의 격차 등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되듯이 우리 경제의 경쟁력의 문제가 그 위기의 본질이 될 것이다.
즉 우리 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쟁력을 상실함으로써 기업과 금융의 전반적 침하가 이어지고 세계경제와의 통합에 실패하면서 우리 경제가 국제경제사회에서 그 역할과 위치가 축소되고 궁극적으로 도태되어 가는 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위기는 성격상 서서히 그리고 우리가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게 마련이다. 마치 석 숭이 말 한 두 번째 위기와 같이 말이다.

이런 성격의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은 명백하다. 경제를 비롯한 주요한 국가운영의 틀을 ‘시장의 원리’를 기본으로 철저히 바꾸고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경쟁구조를 바탕으로 우리경제의 경쟁력의 원천을 보강하면서 한편으로는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를 충실히 수용함으로써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어떤 위기에도 대응할 수 있는 강인성과 유연성을 미리미리 길러가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다.

우리 경제에 진정한 위기 가능성이 있다면 이러한 데 대한 문제 인식이 제대로 없고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결의도 사회적 합의도 없다는 점이다.
경기의 일시적 변동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이 때마다 위기론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우리 사회의 오늘의 현상과 끊임없이 낙관적인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정치지도자들과 정부의 인기 영합적 경제운영방식이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김 영삼 대통령 이후 이미 세 번에 걸쳐 민간 대통령이 나와 국정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정치의 민주화 차원에서 박 정희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물론이고 그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나 그가 채택한 경제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 들 모두가 박 대통령이 그의 개발시대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경제사상 그러나 벌써 탈출했어야 하는 한국경제의 3대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들 중 누구라도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위기의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국민들을 적절하게 설득 지도하며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시장 원리에 맞게 재정비하고 우리 경제의 세계 경제와의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에 정면으로 도전했거나 하고 있다면 오늘의 우리 경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조적 위기의 가능성으로부터는 이미 벗어나 있을 것이다.

정말 한국경제가 또 다른 위기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면 이는 바로 지난번 이미 경험했던 위기에 대한 적절한 인식 그리고 이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위기의 본질과 배경에 대한 국가 사회적 인식 특히 국가 지도자들의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 즉 ‘인식(認識)의 위기’야 말로 진정 우리경제가 당면한 위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