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0월 29일자, 34면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재임이후 : 2005년 10월 29일


벤처 잇단 좌초 … 신화에서 깨어나자


최근 로커스, 터보테크 등 1세대 대형 벤처기업들의 연이은 좌초로 올해 들어 간신히 회복세에 접어든 벤처 분위기가 위축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던 이들 성공신화 주인공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어렵사리 일으키려는 우리 중소기업들의 기업가 정신이 또 한번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선다.

벤처기업이 좌초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패 그 자체보다 분식회계다. 로커스, 터보테크뿐만 아니라 2, 3년 전의 새롬기술, 골드뱅크 사건도 분식회계가 문제였다. 벤처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벤처기업의 분식회계로 인한 추가적인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벤처기업의 분식회계 문제를 단순한 일회성 문제가 아니라 우리 경제의 중요한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 퇴행성 신드롬으로 인식하고 심도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분식회계는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를 기만하여 이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힐 뿐만 아니라, 자본시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려 투자 위축은 물론 나아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국가 신뢰도와 시장 경제질서 확립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분식회계는 문제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회사의 실적을 좋게 보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자산이나 매출을 고의로 부풀리거나, 회사 돈이나 자산을 사용(私用) 내지는 횡령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장부를 조작한다. 그리고 한번 저지른 분식은 계속 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회사와 개인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벤처기업인 개인의 도덕적 해이나 기업윤리가 문제이고 당사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사회적ㆍ제도적 문제 때문에 벤처기업인들이 분식회계의 유혹에 빠져들게 하는 요소에 대해서도 심각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벤처기업의 특성이 고려되어 변칙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원활한 금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장이 작동하고 있는지, 인수합병(M&A)시장이 형성되어 적절한 투자 회수가 가능한지, 벤처기업이나 기술에 대한 금융기관의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벤처 전문경영인과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육성되고 있는지, 견실한 벤처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적절한 유인과 함께 시장과 정책당국의 감독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회계감사 등 회계제도상의 결함은 없는지, 혹시나 정부의 과도한 지원이 벤처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요소는 없는지 등등에 대한 종합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또한 작금의 분식회계로 인한 벤처기업 실패의 근원적인 배경에는 개인, 기업, 정부 등 우리 경제사회 전반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高)성장 신화'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생각한다. 벤처사업은 미지의 사업영역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그 속성상 성공확률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벤처토양이 잘 갖추어진 미국도 벤처기업의 성공률은 5% 수준이다. 실패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공신화에의 집착은 불법을 행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통념, 이른 시간 내에 많은 벤처기업을 양산하고자 하는 정부의 과욕 등을 불러온다. 이런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벤처기업들로 하여금 분식회계를 해서라도 무리한 성공을 얻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벤처산업이야말로 성공에 대한 보상과 실패에 대한 책임이 강하게 작동하는, 즉 시장경제원리가 제대로 작용돼야 할 영역이다. 바로 그것이 건실한 벤처기업 발전의 동인이다. 디지털 지식기반 경제의 선도자이자 혁신주도 경제의 활력소 역할을 할 중소벤처기업이 무리하게 화려한 성공신화를 만들기보다는 내실 있게 진정 '벤처'를 할 수 있도록 모든 경제주체의 생각을 정리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