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Dr. IMF와 한국경제

'깊은 병에 빠진 환자가 명의를 만나 진단을 받고 처방까지 받아 입원해서 한편으로 투약을 하고 수술 받을 준비까지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내가 왜 무슨 병이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겠다고 하는 모습' 이 것이 외환위기 직후 외환위기 발생의 원인과 배경을 밝히고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정치권과 온 언론이 떠들고 감사원에 의하여 특감이 진행되고 한쪽으로 검찰이 이를 형사사건화 하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던 98년 초의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당시에는 현재와 같이 이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가 체계적으로 축적되지는 못했었으나 이미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에 의해 동남아 특히 한국의 외환위기의 구조적 배경과 발생과정에 대한 상당한 연구와 분석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우리의 외환위기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고 치료의 책임을 맡았던 IMF가 일찍이 우리의 외환위기 직후인 97년 12월 4일 우리나라에 대한 자금지원 약속을 하면서 우리 나라의 외환위기의 원인과 배경에 대한 공식적인 분석을 발표한 바 있었다. 이러한 진단과 처방의 대상이 되고있는 환자 '한국경제'만이 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 국내·외 경제학자치고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하여 한두 편의 논문이나 책자를 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 경제연구소의 IMF 데이타 베이스에 들어가 보면 동남아 외환 위기, 특히 한국의 그것을 분석하는 엄청난 학문적 노력이 축적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적어도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동남아 외환위기의 원인과 배경은 더 이상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적 보고서 하나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외환위기에 대한 우리사회의 문제접근 방식을 경험하면서 백제멸망에 관한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백제멸망의 원인을 계백 장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패한 데서 찾으려고 하는 한다면 백제멸망의 배경과 원인이 밝혀질 수 있을까?

백제의 멸망의 배경과 원인을 찾음에 있어서 백제의 국력의 쇠퇴와 신라의 융성의 배경과 과정 등 역사적 구조적 요인과 당시 신라와 세계 최강국인 당의 연합이라는 국제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때까지 신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던 계백 장군이 황산벌전 투에서 전략과 전술의 실책으로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그 결과 백제는 멸망하였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계백 장군에게 그 책임을 추궁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만약 이러한 책임을 묻는 청문회를 한다 면 계백 장군은 무엇이라고 증언할 것인가? 만약 그 때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이겼더라면 그러한 구조적 관계가 변하지 않는 한 백제가 계속 존속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는 이러한 접근방법으로 외환 위기의 원인과 배경을 찾으려고 하는 우(愚)를 범해왔다는 생각을 떨 칠 수 없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성격상 구조적 측면과 상황적 내지 환경적 측면, 국내적 측면과 국제적 측면을 종합한 메트릭스 구조하에서 이해되어 야한다. 이와 관련한 무수한 국·내외 전문가와 관계기관의 관련자료와 연구결과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구조적이고 종합적인 문제접근 방식을 도외시하고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이를 정치적 목적에서, 또는 국민들의 한풀이에 활용하려는 의도 하에서 모든 것을 진행시켜 왔지 않았나 생각된다.

국민들이 당하는 경제적 고통을 달래려는 정치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에의 접근방법을 잘못 찾고있고 따라서 이런 접근 방법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이 현재의 진행과정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현상이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를 맞았고 IMF의 자금지원을 받았던 나라가 선 후진국 막 론하고 30여 나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일찍 외환위기를 맞았던 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일찍 전직 태국 중앙은행 총재인 누쿨Nukul 을 위원장으로 7인의 권위 있는 전문가로 위원회(소 위 '누쿨Nukul 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국의 외환위기의 배경과 원인 및 책임소재를 가려 설득력 있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고 이 보고서는 국제적으로 내용의 타당성과 권위가 인정되고 있다. 이 이외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와 같이 이 문제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거나 감사기관 또는 검찰 등 경제 비전문기관이 나서서 조사하고 심지 어 이것을 형사사건화 하여 2년이 가까워 오도록 긴 기간을 여기에 소비하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2년이 가까워 오고 그간 감사원 특감, 검찰의 소추, 무려 27회에 걸친 재판과정, 국회청문회, 여론과 언론의 검증을 거치면서 97년 중 우리들이 행한 정책에 대해 무수히 많은 반성도 해보고 그렇게도 많은 이에 관한 논문과 책자도 읽어보고 또 많은 사람들과 토론도 해보면서 필자는 스스로 외환위기의 원인과 배경에 대하여 나름으로의 생각을 계속 정리해 왔고 그러한 생각의 일부는 청문회 과정에서나 재판과정을 통하여 밝힌 바 있지만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 발표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위기발생 후 초기 단계에서는 더욱 더 합리적인 분석과 토론보다는 선점된 고정관념에 의한 마녀사냥식의 비판과 지적, 논조가 지배하고 있었음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필자는 당시 극히 제약된 여건 가운데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당시 생각하고 있던 점 주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가 오게된 구조적 원인과 이에 대한 대응방향에 대한 견해를 몇 번 밝힌 바 있다.

제1부에 실린 두 개의 강연은 당시 필자가 생각한 외환위기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그러한 위기로부터 우리경제가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설명한 것으로 지금 필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정리된 체계를 갖추지는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 스스로도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외환위기가 갖는 보다 복합적인 성격 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우리의 외환위기가 국제금융의 구조적 문제점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점, 97 년의 정치적 상황이 외환위기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해 가 결여되어있었다고 생각되며 그 이후 국내·외 전문가들에 의한 이외 관련한 일련의 분석결과를 보면서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이 하게되었다는 점을 밝힌다.